
토마스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그의 마스터피스로 알려진 노벨상 수상작인, 마의 산(1924)에서 비로서 해결한 내면 대립의 한 축을 담당한, 토마스 만 자신에게는 과도기적 작품 중의 하나 이다.
그는 살아야 하는 삶과 갈망하는 삶을 이분법으로 나눠 그 괴리와 부조리함 속에서 오랜 시간 고민과 갈등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 갈등의 양 축을 담당하는 대표작을 “베네치아에서의 죽음”(1912)과 “토니오 크뢰거”(1903)라고 볼 수 있겠지만, 더 후기의 작품이고 그 대립에서 예술성의 측면을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위대한 예술가인 말러의 죽음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란 것을 고려해 보았을 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 문학적으로 더 매력적인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이 두작품은 마치 거울처럼, 그리고 서로 대립적인 다른 선택을 한 평행우주 속의 각각의 자신의 이야기와 같이 대칭적인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1912년에 발표된 단편소설로서, 아름다움, 욕망, 죽음, 이성과 정열의 충돌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구스타프 폰 아슨바흐는 현대의 이성적인 개인을 상징하며, 자신의 감정과 욕망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여행 출발과 타츠이오에 대한 집착은 그가 원시적 본능으로 돌아가고, 문명적인 삶의 제약을 거부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콜레라 전염병은 베니스와 문명 자체의 아름다움과 세련된 겉모습 아래에 도사리는 부패와 쇠퇴를 상징합니다. 구스타프의 죽음은 문명의 제약과 이성의 충동 사이에서 그가 고립되어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소설은 아름다움과 욕망, 죽음과 이성의 충돌을 다루면서도, 고대 그리스의 도덕과 세계관, 남성/소년 성에 대한 고대 그리스 문화의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에 대한 구스타프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구스타프는 이러한 관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려 하며, 예술가의 창작과정에 대한 비밀을 숨길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소설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아름다움과 욕망, 죽음과 이성의 충돌 등을 다루면서도 인간의 본성과 문명의 제약 사이에서의 갈등을 보여줍니다.

미학적 실존 앞에 무너지는 지성이라는 이름의 오만한 허상.
그에게 과도기적인 작품임에도 매력을 갖는 이유는 구스타프 말러의 죽음에 영감을 받아서 쓰여졌다는 배경이야기와 갈망하는 삶을 따라 영원으로 무한히 수렴하는 종말의 아름다움의 매끄러움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예술가, 삶의 끝에서 발견한 미학적 실존을 추앙하다
우리는 추앙함의 발현과 동시에 사랑에 빠지곤 한다.
낙원에서의 영면.
사람은.
사람은 삶의 수많은 분기점에서 끊임없이 매순간 선택하며
산다. 심지어 지각하지 못할 때조차 우리의 선택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박제되어 진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익숙해 질때쯤 우리는 깨닫는다.
이것은 자신의 실존을 선택하는 동시에 이면으로는 무한한 가능성의
박탈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반대편을 꿈꾸고, 가정하고, 욕망하게 된다.
우리의 실존이 결코 닿은적도 없고, 또 그 실존 때문에 결코
그렇게 될 수도 없는 것들은 집요하게 소유욕을 자극하고
결코 가질 수 없는것들에 깊이 상심하게 된다.
만족하지 못하는 삶이란 꽤 종교적 원죄처럼 들리지만
사실 어떤 존재를 추앙하고, 어떤 가치를 선망하는
삶은 꽤 귀하고 아름다운 삶이 아닌가 한다.
작가의 편협함은 모든 가치를 이분법적 대립관계로 해석하고
선택을 강요한다. “흑이나 백이냐. 당신을 명확하게
밝혀서, 나의 선택지 중의 하나로 정의 하라.”
하지만 기억하는가!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기 시작한 상실감은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무한한 가짓수를 가진 무한한 갯수의
선택지 자체인, 그 자유로운 무한함이었다.
그 무한함을 작가의 이분법적 편협함으로 귀속시키려 한다.
어쩌면 인류의 모든 것이 너무 과대평가 되었을 뿐일 수도 있다.
우리의 실체는 유전자로 프로그래밍된 소프트웨어의 실재일
뿐이며 우리의 인식이나 자각은 그 소프트웨어에 기댄
허상일 뿐인 것은 아닐까.
유물론적 세계관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혼이라던가 자의식 이라던가는 결국 우리의 나약한
자존을 지탱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환상속의 버팀목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진실을 알고도 외면하며 붙들고 매달리게 되는
그런 지지대 말이다.
양자물리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영원함은 애매한 개념이
되어 버린다. 미래를 모두 알고 있지만 결코 말해주지 않는 방정식처럼.
하지만 우리의 갈망이 시간속에 새겨진다면
그 추앙이 우리가 존재하였음을 말해 주지 않겠는가.
그리고 항상 유한함을 완성하는 건 적절한 종말이다.
그래서 나는 추앙한다. 그 신념으로 가득찬 종말을.
그리하여 남게된 시간 속의 영원함을…